"혹시 농구 좋아하세요?"
1990년대는 분명 '라테 시절'일겁니다. 농구는 90년대 세대를 지배했습니다. 미국엔 마이클 조던이 있었고 한국엔 이상민과 서장훈, 현주엽과 전희철 같은 농구대잔치 세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에게 농구의 진정한 재미를 알려준 이는 그들이 아니라 슬램덩크의 빨간 머리 고등학생 강백호였습니다.
슬램덩크는 일본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작품입니다.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일본 만화 잡지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됐습니다. 한국에서도 1992년부터 연재가 시작됐고 TV 애니메이션으로도 방송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왼손은 거들뿐"의 강백호,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 등등 숱한 유행어가 탄생했고 단행본이 나오는 날이면 학교 앞 서점과 문방구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특히 슬램덩크가 유독 큰 사랑을 받았던 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한국식 작명과 신 내린듯한 번역 덕이 컸습니다.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정대만, 송태섭, 권준호 등 등장인물 하나 하나의 이름이 오히려 일본판보다 더 입에 잘 붙고 기억에 남는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박상민이 부른 주제가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90년대를 제패한 추억의 만화 슬램덩크가 26년 만에 극장판으로 귀환합니다. 한국 개봉일은 2023년 1월 4일입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개봉해 글로벌 대작 아바타를 잠재우고 있다고 합니다. 상영시간은 125분. 영화는 북산고와 전국 최강 농구부 산왕공고가 맞붙는 전국 고교 농구 선수권 대회의 한 경기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후반전 20여 점 차로 뒤지는 북산고의 역전을 노리는 모습을 어떻게 그려냈을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3) | |
감독, 각본, 원작 이노우에 다케히코 |
러닝타임 125분 |
안한수 감독 "포기하면 그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 |
송태섭 "제가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건 농구뿐이었어요" |
강백호 "왼손은 거들 뿐" |
채치수 "리바운드를 제압하는 자가 시합을 제압한다" |
서태웅 "여기서 널 쓰러뜨리고 간다" |
정대만 "그래 난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
또 다른 중꺾마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
슬램덩크에는 수 많은 명대사 등장합니다. 불꽃남자 정대만은 최강팀 산왕과의 경기에서 3점 슛을 넣은 뒤 "그래 나는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명대사를 날립니다. 많은 팬들이 가장 명장면으로 꼽는 부분일 겁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다른 부분입니다. 22점이나 뒤처진 경기에서 안 감독은 강백호를 빼고 안경선배를 투입합니다. 화가 난 강백호는 경기를 포기한 거냐라고 묻습니다. 안 감독이 대답합니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예요".
안 감독은 패색이 짙어가는 순간에도 선수들을 격려합니다. "내가 산왕이라면 상대의 마음이 완전히 꺾이길 기다리겠지요, 우리는 꺾이지 않을 테지만".
안 감독의 이 대사는 분명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 카타르 축구월드컵에서 놀라운 투지를 보여준 축구 대표팀을 향한 응원의 슬로건 '중꺾마'를 슬램덩크에서 우리는 이미 배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광의 시절은 언제인가요?
뜨거웠던 과거와 마주할 수 있는 이번 애니메이션은 분명 반가운 것이지만 일본 만화시장이 과거에 대한 향수에 기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일본 만화는 여전히 히트작을 내고 있지만 문화적인 파급력은 예전만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한국 웹툰에 가려지는 일본 만화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지난해 글로벌 웹툰 시장은 37억 달러, 2030년엔 56억 달러 규모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지만 일본은 출판만화가 19억 달러로 전년보다 2.3% 감소했다는 내용입니다. 디지털 문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지만 여전히 종이책 방식을 고집하는 문화적 보수성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그 시절 틈만 나면 농구를 하게 만들고 경기장으로 팬들을 불러 모으던 한국농구도 일본 만화산업처럼 위축되고 있습니다. 한국 남자농구의 FIBA 랭킹은 36위, 지난 3월 랭킹보다 5계단이나 하락했습니다. 1969년과 1997년 아시아선수권 우승 이후 25년째 더 이상 정상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수층이 얇고 유망주들의 성장이 더디면 국제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농구 저변 확대와 유소년 육성을 위한 지속적인 투자만이 해법입니다. 한국농구에도 영광의 시절이 되돌아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만화의 원작자가 직접 감독과 각본을 맡았지만 원작에서는 5인방 중 조연급이었던 송태섭이 주인공을 맡아 다른 주인공들의 분량이 축소된 탓에 원작에 대한 충성도가높은 팬들에게는 아쉬움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추억의 귀환, 30~40대가 대거 극장으로 몰려 나올 것인지, 일본처럼 한국에서도 흥행이 될 것인지 팬들의 응답이 몹시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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