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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인과 병자호란 그리고 천연두

by 소피스트28호 2023.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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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인이 병자호란을 거쳐 청나라 볼모 생활로까지 스토리가 진전됐습니다. 극중 주인공이 천연두에 감염되기도 했는데 실제로 천연두 때문에 병자호란이 조기 종결됐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알트태그-드라마 연인과 천연두 썸네일


서울대 구범진 교수 "병자호란 조기 협상은 천연두 때문"

청나라 역사 전문가인 서울대 동양사학과 구범진 교수는 2016년 학술논문 '병자호란과 천연두'를 발표한데 이어 2019년 내용을 보완하고 논문을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책을 발간했습니다.


①청태종실록 '피두선귀(避痘先歸)' 구절

논문과 책의 핵심은 병자호란을 빨리 끝낸 것은 천연두였다는 내용입니다. 1636년 12월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침공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남하해 이듬해 1월 13일 인조를 남한산성에 몰아넣고 포위했습니다. 명나라의 배후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 조선의 협상을 연속 거절하며 장기전, 고사 작전을 벌이던 홍타이지가 1월 17일 쫓기듯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알트태그-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책 표지알트태그-홍타이지의 전쟁 6장의 목차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과 6장의 내용 목록

 

저자인 구 교수는 바로 전날 홍타이지 부근에서 천연두 환자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제기합니다. 근거는 청태종실록에서 발견한 '피두선귀' 구절입니다. 홍타이지가 천연두를 피해 먼저 귀국했다는 겁니다. 인조의 항복을 받자마자 서둘러 선양으로 귀국길에 오르며 한양에 입성하지도 않았고 청나라 군사의 철수 과정에서도 큰 피해 없이 전쟁이 마무리됐다는 시각입니다.

저자는 병자호란이 철저히 홍타이지의, 홍타이지에 의한, 홍타이지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규정합니다. 병자호란 10년 전인 1627년 청나라의 전신인 당시 후금은 광해군의 폐위 문제를 구실로 조선을 침략해 형제의 관계를 맺은 뒤 물러났습니다.

홍타이지는 병자호란 발생 8개월인 병자년 4월 11일 국호를 다이칭 구룬, 한자로는 대청국(大淸國)으로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치루었습니다. 이 자리에 조선 사신들도 참석했는데 황제에게 복종을 뜻하는 삼궤구고두(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림)의 예를 거부해 홍타이지의 분노를 샀습니다. 진짜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조선을 확실하게 굴복시켜야 하는 이유가 됐고 병자호란은 홍타이지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잔인한 전쟁이 됐습니다.

알트태그-청나라 국기알트태그-청나라의 영토
청나라의 국기와 영토 상황


홍타이지는 조선 왕궁에 들어가 조선왕을 굴복시키는 꿈을 꿀 만큼 한양 입성에 집착했지만 조기 종전을 한 후 한양은 물론 다른 어느 성에도 들어가지 않고 서둘러 돌아갔습니다. 또 선양에 돌아가서도 볼모로 끌려온 소현세자 일행을 두 달 가까이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 배경에 천연두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는 분석입니다.

②천연두에 민감했던 청 왕조

청 왕조는 역사상 천연두에 민감했던 것으로 평가됩니다. 청제국을 건설한 만주인은 중원을 장악하기 이전부터 왕과 왕족은 물론 수많은 백성들이 천연두로 사망했고 신의 뜻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일찍이 만주인들은 천연두 환자를 발견, 보고하는 관직 '사두관(査痘官)'을 두었고 왕은 유행 시기에는 천연두를 피해 떠나 있는 '피두(避痘)'를 하기도 했습니다. 병자호란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참전한 홍타이지는 면역을 갖지 못한 '생신(生身)'으로 피두 때문에 여러 차례 중요한 장례나 제사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알트태그-병자호란과 천연두 논문 바로가기
병자호란과 천연두 논문 바로가기


병자호란 전쟁사의 가짜뉴스

저자는 다양한 사료를 분석해 병자호란 전쟁사에 대한 오류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에 대한 팩트체크인 셈입니다.

①청나라 병력 5만 명 넘지 않았다

알트태그-청나라 군사의 전투 모습알트태그-청나라 기마병의 전투 모습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병력은 5만을 넘지 않았다는 분석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병력은 얼마였을까요? 인조실록에는 30만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통설은 12만 8천 명입니다. 1986년 발간된 병자호란사에서 나온 것인데 저자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유재성씨는 훗날 임의로 만든 것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잘못된 통설이 그동안 계속 받아들여져 온 겁니다.

구 교수는 청태종실록 등을 근거로 정규 병력 3만 4천 명에 쿠투러로 불린 마부 등의 하인 1만 1천 명으로 추정합니다. 누락이나 오차를 감안해도 5만 명은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②조선의 전쟁 대비 허술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조선 국경을 넘은 청나라 군사는 동과 서, 두 개로 나눠 진군했습니다. 홍타이지는 서쪽으로 진군했는데 6개 부대가 여러 날에 걸쳐 시차를 두고 이동하는 작전을 펼쳐 평양 남쪽 정방산성을 지키던 도원수 김자점이 근왕명령을 받고도 출동할 수 없었다고 분석합니다.

여진 군사가 1만 명을 채운다면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전력도 강력했던 것으로 평가됩니다.

병자년 12월 6일 침공을 알리는 봉화가 타올랐지만 무시했다는 기록과 관련해서도 청나라의 선봉대가 8일에야 압록강을 건넌 것으로 확인됐다며 신뢰도가 부족한 개인 문헌에 따른 오류라고 지적했습니다.

알트태그-이긍익의 역사서 '연려실기술'
김자점의 봉화 무시 주장을 담은 '연려실기술'


이런 주장과 분석에 대해서는 학계의 합의가 필요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명분과 실리 논쟁에만 빠져 허망하게 자멸했다는 자학과 자조에서 벗어나 실상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③청으로 끌려간 피로인 50~60만 명 '엉터리'

병자호란 이후 청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 '피로인(被擄人)'이 50~60만 명이나 된다는 추정도 사실이 아니라는 분석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인구는 130만~240만 명으로 조선인 50만 명이 끌려갔다면 이후 최대 인구 집단이 되었을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또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조선에서 50만 명이나 되는 포로를 끌고 갈 여력도 이유도 없었다고 추정합니다.


천연두, 1980년 5월 8일 완전 종식


기록상으로 천연두는 기원전 1500년, 고대 인도에서 발생했습니다.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5세의 미라에서도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무역과 교류, 전쟁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신대륙인 아메리카로 확산됐습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에 전파된 이후 주기적으로 유행했고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는 4만 명이 감염돼 1만 1,50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우유를 짜는 사람들이 소의 천연두인 우두에 감염돼 가볍게 앓고 나으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 점에 주목해 처음 백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알트태그-WHO의 천연두 종식 선언
천연두 박멸 소식을 전한 세계보건기구의 기관지 `월드 헬스' 1980년 5월호 표지


세계보건기구 WHO는 1980년 5월 8일 천연두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종식되었다고 공식 선언했습니다. 과거 왕조의 운명을 가를 만큼 무서운 전염병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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