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의 대대적인 이스라엘 공습으로 5차 중동전쟁의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중동지역 분쟁의 씨앗이 된 밸푸어 선언에서부터 인티파다, 오슬로협정까지 분쟁일지를 정리합니다.
중동 분쟁의 씨앗 '밸푸어 선언'
중동 분쟁의 씨앗이 된 이스라엘 건국에는 영국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17년 11월 2일, 당시 영국의 외교장관 아서 밸푸어는 유대계의 유력 인사인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영국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나라 건설을 긍정적으로 여기며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내용입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유태인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유대 자본을 끌어들여 전쟁 비용을 조달하고 유태인이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의 참전, 그리고 유태인 과학자들의 무기 제조 도움을 받기 위해 '러브 콜'을 보낸겁니다.
그런데 이는 2년 전에 발표한 맥마흔 선언을 뒤집은 것이었습니다. 1915년 이집트 주재 영국대사관의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은 아랍의 지도자 후세인 빈 알리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영국과 함께 싸워주면 아랍의 독립을 지지하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랍인들은 이 약속을 믿고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 아리비아의 로렌스는 당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국은 스스로 약속을 뒤집어 버렸습니다.
밸푸어 선언으로 유럽 유대인들 사이에 팔레스타인 지역 고향 땅에 나라를 세우자는 시온주의 운동이 번지면서 유대인의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정의 | |
유대인(Judea人) | 유대인 또는 유태인 둘 다 맞는 표현이지만 한자문화권이 아닌 나라들은 원어를 존중해 '유대인'을 널리 쓰고 있음 |
팔레스타인인(Palestine人) | 하나의 민족을 칭하는 명칭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인을 지칭함 |
1차대전의 승리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관할하게 된 영국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몰수해 유대인 정착자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아랍인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유대인에게 내주고 쫓겨나야 했고, 강하게 반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유대인 인구 증가 | ||
1922년 8만4천 명 |
1931년 17만 5천 명 |
1947년 63만 명 (팔레스타인지역 전체 인구의 1/3) |
2002년 잭 스트로 당시 영국 외무장관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밸푸어 선언을 "명예롭지 못한 결정"이라고 밝혔고 2013년 노동당 제러미 코빈 등 하원의원들이 "영국의 역사적 과오"라며 사과의 뜻을 밝혔지만 영국 정부 차원의 사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1차 중동전쟁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에서 손을 떼게 되고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충돌이 끊이질 않습니다. 국제연합(UN)은 1947년 팔레스타인 지역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결의안 181호를 채택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 국가와 유대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은 UN대표가 직접 관할하는 국제도시로 개방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UN 결의안 181호 '2개 국가 해법' |
①전체 면적의 56.47%에 유대 국가 건설 ②나머지 42.88%에는 아랍국가, 팔레스타인 원주민 중심 국가 건설 ③예루살렘(0.67%)은 UN대표가 직접 관할하는 국제도시로 개방 |
아랍 측에서는 결의안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의 땅에 유대 국가가 세워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해안지역을 포함한 대부분의 비옥한 땅이 유대 국가에 할당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1938년 5월 15일,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습니다. 다음날 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집트를 위시한 아랍국들이 이스라엘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은 1949년 1월에 끝났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면적의 78%를 장악했고, 나머지 지역 중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점령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장악한 지역에 살고 있던 7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난민으로 전락했습니다. 아랍어로 '나크바'(대재앙)이라고 부르는데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만 팔레스타인인이 거주하는 체제는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2~4차 전쟁과 인티파다, 오슬로 협정
① 제2차, 3차, 4차 중동전쟁
2차 중동전쟁은 1956년 10월 29일 발발해 11월 7일 끝났습니다.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 것을 계기로 이스라엘이 이집트와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공습을 시작했습니다. 2차 전쟁은 미국과 당시 소려의 중동 개입을 확대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소련은 아랍 국가들을 지원하면서 양측의 대립이 심화되었습니다.
3차 중동전쟁은 6일 전쟁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1967년 6월 5일 발발해 10일까지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간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이 서안 지구와 시나이 반도에 군대를 배치하자 이스라엘이 기습 공격을 감행해 승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토가 크게 확장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973년 10월 6일 발발해 25일까지 계속된 4차 중동전쟁은 욤키푸르 전쟁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욤키푸르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속죄일(贖罪日)로 이스라엘의 공휴일인데 당시 이집트와 시리아가 기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핵폭탄 사용을 검토할 만큼 위기에 몰리기도 했는데 결국 승리했지만 피해가 컸던 전쟁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전력(戰力)상 약체인 아랍 측이 공습할 가능성이 낮다는 오판을 했는데 하마스는 4차 전쟁 발발 50년이 되는 날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이스라엘 측은 이번에도 오판을 되풀이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② 인티파다(민중봉기)
인티파다(Intifada)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반이스라엘 독립투쟁을 통칭하는 말로, 1차(1987~93년)와 2차(2000년 9월)로 나뉩니다. 1차 인티파다는 1987년 12월 가자 지구에서 순찰 중이던 이스라엘군 차량이 팔레스타인인을 치어 숨지게 한 사고를 계기로 촉발됐습니다. 1차 인티파다 기간 동안 이스라엘군에 의해 숨진 팔레스타인인은 1,070명, 이 중 어린이 237명이 포함돼 있습니다. 무슬림 형제단의 분파인 하마스가 만들어졌습니다.
2차 인티파다는 2000년 이스라엘의 샤론 전 국방장관이 이슬람 성지인 알아크사 모스크를 무장 군인들과 함께 기습 방문한 것에서 비롯됐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아랍계는 격렬하게 반발했고 사태가 악화되면서 2차 인티파다로 이어졌습니다.
③ 1993년 오슬로협정‥팔레스타인 제한적 자치 인정
1차 인티파다는 1993년 오슬로 협정 서명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아라파트 의장이 극비 회동을 통해 평화협정을 마련하고 1993년 9월 13일 오슬로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자치와 이스라엘 존재를 인정한 '팔레스타인 자치 협정 선언'이 핵심입니다. 이 협정으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제한된 자치권을 부여받은 팔레스타인은 1994년 7월 아라파트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 자치정부(PA)를 수립했습니다.
오슬로 협정은 1995년 9월 2차 협정으로 완성됩니다.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원칙 아래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 등 점령지를 반환해 팔레스타인의 자치 국가 설립을 지원하고 아랍권은 이스라엘의 국가 존립을 보장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이 협정을 체결한 이스라엘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아라파트 수반은 199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극우파가 협정에 반발하면서 라빈 총리는 1995년 11월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숨진 라빈을 이어 집권한 우파연합의 네타냐후 총리가 점령지 반환을 거부하면서 협정은 현재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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