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연인에는 '환향녀'가 등장합니다.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을 뿐인데 조선 사회는 가혹을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했습니다. 독립운동가 천연희 여사는 현실판 길채의 삶을 살았습니다.
병자호란의 여성 전쟁포로 '환향녀'
조선 인조 때 나만갑(羅萬甲)이 지은 병자호란 당시의 난중일기인 '병자록'에 따르면 당시 청나라 수도 인근 60만 인구 중 상당수가 조선에서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 끌려온 여성들은 청나라의 성적 노리개처럼 다뤄지고 노예로 거래되며 갖은고초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여성들의 수난은 살아서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계속 됐습니다. 병자호란을 겪고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을 부르던 환향녀(還鄕女)는 문자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일 뿐이었지만 당시 조선 사회는 청나라보다 더 가획하게 이들을 대했습니다.
병자록 |
인조실록 |
물에 빠져죽은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 위에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다고 기술 |
□ 당시 좌의정 최명길이 환향녀를 변호한 발언이 기술됨 □ 전쟁 중에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쓰고도 밝히지 못한 여인이 얼마나 많으며, 사로잡힌 부녀자들이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볼 수 있느냐라고 발언 |
드라마 연인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청나라로 끌려간 여주인공 길채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인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없었겠죠? 동네 사람들도 오랑캐에게 더렵혀진 몸, 뻔뻔스럽게라며 손가락질 합니다. 아버지마저 딸을 목 졸라 죽이려고 합니다.
비속어로 사용되는 화냥년은 바로 환향녀에게서 나온 말이라는 것이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정절을 잃어버린 여자를 비하하고 욕하는 말이 됐습니다. 하지만 역사서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대에는 단어가 사용된 증거가 없습니다.
당시 역사기록에도 전하고 있습니다. 1638년(인조16년) 3월 11일자 인조실록에는 환향녀에 대한 두 개의 상소문 내용이 나옵니다. 1638년 3월 신풍부원군 장유는 며느리가 몸값을 치르고 돌아왔는데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승지 한이겸도 같은 날 상소를 올렸는데 정반대의 호소를 합니다. 딸의 몸값을 치르고 데려왔는데 사위가 새 장가를 가려한다며 원통하다는 내용입니다.
같은 날 올라온 정반대의 상소문 | |
□ 신풍부원군 장유의 상소 □ 며느리가 청국에 잡혀갔다가 돌아왔는데 어 이상 아들의 배필로 인정할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장가를 들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내용 |
□ 승지 한이겸의 상소 □ 사위가 청나라에서 돌아온 딸과 이혼하고 새장가를 들려한다고 호소하는 내용 |
환향녀는 당시 조선 사회의 큰 논쟁거리였지만 이혼과 후손 문제 등 가부장적인 관점에서만 다뤄졌고 당사자인 여성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배제됐습니다. 길채는 이런 역경에 굴하지 않고 다른 삶을 선택합니다. 사회적 낙인에 절망해 목숨을 버리려는 여성과 전쟁고아들을 모아 함께 사는 길을 선택합니다.
우리말 아름답게의 뜻은 나 답게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길채는 길채답게 아름다운 자신을 잃지 않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을 걷습니다.
드라마 연인과 영화 '굿 윌 헌팅'
연인 17화(2023년 11월 4일)에서 길채는 이장현을 만나 자신의 정절에 대한 생각을 묻습니다.
[길채] 그럼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길채는요? |
[이장현] 안아줘야지. 많이 아팠을텐데 |
드라마 속 이장현의 대사는 길채를 위한 진심인 동시에 당시 죽기를 강요받았던 다른 여성들을 위한 위로의 메시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이장현과 같은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교훈이기도 합니다.
이장현의 드라마 속 대사는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1997)에서 숀 교수가 윌에게 전한 진심과 맥을 같이 합니다. 영화 속에서 숀 교수는 어린 시절 받은 상처로 인해 세상에 마음을 열지 못하는 불우한 반항아 윌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 뒤 진심어린 위로를 건넵니다.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
누군가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위로를 건낼 때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사랑은 서로를 구원하고 공감과 위로는 상처를 치유합니다.
길채의 현실판 인생 독립운동가 천연희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사진 신부들이 생겨났습니다. 하와이로 이민간 남성들이 결혼을 위해 한국에서 신부들을 데리고 오는데 사진만 보고 인연을 맺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사진 신부라고 불리웠습니다.
그런데 사진 신부들은 단순히 결혼 목적만으로 이국땅으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힘든 한국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지의 세계를 선택한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실제로 교육을 받은 부유한 집안의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 일부가 상세한 기록을 남기면서 사진 신부의 역사는 알려지게 됐습니다.
2022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로 대통령 표창을 받은 진주 출신의 천연희 여사(1896~1997)가 대표적입니다. 부유한 가문의 며느리였던 외할머니는 손녀가 책임이 덜한 곳에 시집가기를 원했고 어머니 역시 하와이행을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마친 천연희 여사는 19세에 부푼 꿈을 안고 하와이로 향했는데 첫 번째 남편은 불성실하고 무능했습니다. 술 문제와 무능함 때문에 이혼하고 두 번째 남편과도 헤어집니다. 남편이 딸의 대학 진학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숙집 운영에서 호텔을 사들일 만큼 성공한 사업가가 된 뒤 미군 출신 백인과 세 번째 결혼을 했는데 '백인 남성과 결혼한 여자'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공부 잘하는 자신의 아이를 좋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기 위해 당시 사회 통념으로는 쉽지 않았던 이혼을 선택하고 사업으로 직접 돈을 벌어 자녀들을 교육했습니다. 또 한인 네트워크 다져 이미자의 삶을 함께 개척하고 독립 자금을 만들어 샌프란시스코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해주, 만주의 독립군을 지원했습니다.
삶의 주요 고비마다 놓인 복잡다단한 선택을 능동적, 주도적으로 결정하며 가부장제와 타협은 물론 일제와도 맞선 천연희 여사의 삶은 드라마 속 길채의 현실판이었다고 생각됩니다. tvN의 알쓸별잡을 통해 그녀의 삶이 알려졌지만 더 많은 이들이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사님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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