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군사 반란을 진압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전두환(전두광)의 신군부에 맞서 장태완(이태신)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본 헌병감이 분투했지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반란 진압 결정적 기회 놓치다‥9공수의 부대 복귀
신군부에 맞선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진기 육본 헌병감,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1979년 12월 12일 저녁 6시 30분경, 연희동의 한 요정에 함께 있었습니다.
작전명 '생일집 잔치'. 신군부가 자신들의 편이 아닌 3명의 장성들을 만찬을 이유로 유인해 발을 묶어 놓았습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정승화 총장의 납치소식을 보고 받고 부대로 급히 복귀했습니다. 휘하 4개 공수여단 중 1,3,5 3개 여단은 반란에 가담한 상황, 정병주 사령관은 경기도 부평에 있는 9공수여단에 육군본부로 출동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반란군 측 1공수여단도 김포에서 서울로 향하고 있어 아군끼리 교전이 일어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1공수여단 (신군부 병력) |
9공수여단 (반대 병력) |
□ 박희도 1공수여단장 김포서 890명 출동 13일 새벽 행주대교 돌파 육본,국방부 장악 |
□ 윤홍기 9공수여단장 (갑종 출신,하나회 아님) 경기도 부평 주둔 정병주 특전사령관 명령으로 출동 중 육본 명령으로 회군 □ 서로 병력 철수하자는 이른바 신사협정 믿고 부대 복귀하는 바람에 반란군 진압 기회 상실 |
9공수가 먼저 서울에 진입할 수 있었지만 윤성민 육본 참모차장은 윤흥기 9공수여단장에게 부대복귀를 명령했습니다. 9공수가 철수하면 1공수도 철수하겠다는 전두환의 말을 믿고 내린 명령, 9공수는 부대로 돌아갔지만 1공수는 그대로 서울로 진입해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했습니다.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기회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특히 3공수단은 자신들의 사령부인 특전사령부를 공격해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합니다. 이 과정에서 김오랑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은 권총 한 자루로 맞섰고 결국 숨졌습니다. 정해인 배우가 맡은 오진호 소령이 김오랑 소령이며 정만식 배우가 연기한 공수혁 소장이 정병주 특전사령관입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
공수혁 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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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5월11일 생 육사 9기 9공수 출동 명령 총상 입고 체포 강제 예편 뒤 88년 10월 행불 이듬해 3월4일 시신으로 발견 |
□ 정만식 배우 |
김오랑 소령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
오진호 소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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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4월5일 생 육사 25기 정병주 사령관 호위 과정에서 총격으로 사망 2014년 보국훈장 삼일장 추서 |
□ 정해인 배우 |
장태완(이태신) 수경사령관, 육본에 막혀 실기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에 맞서 가장 군인다운 모습과 본분을 보여주는 이태신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모티브로 한 인물입니다.
영화에서 이태신, 전두광 역을 맡은 두 배우의 외모 차이 때문에 실제 나이를 알 수 없지만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전두환은 1931년생으로 동갑입니다. 장태완 사령관은 지금의 ROTC와 유사한 갑종 출신으로 임관이 5년이나 빠르지만 전두환이 하나회 소속으로 빠르게 진급해 1212 당시 계급은 별 두 개, 소장으로 같았습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 |
전두환 | |
□ 이태신 정우성 배우 |
극중인물 | □ 전두광 황정민 배우 |
□ 31년 9월13일 생 2010년(향년 78세) □ 육군종합학교 11기 임관(1950년) 7대 수경사령관 (79년 11월19일 ~ 12월12일) |
이력 | □ 31년 1월18일 생 2021년(향년 90세) □ 육사11기(1951년) 소위 임관 (1955년) 보안사령관 (1979년 3월~) 합동수사본부장 (1979년 10월) |
장태완 사령관은 1212 당시 저녁 만찬에서 돌아와 신군부에 맞서 분투를 벌였습니다. 신군부 측의 가장 연장자인 유학성으로부터 직접적인 회유도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관저에 즉각 경비 병력을 보내 구출을 시도했고 전차 중대와 포병대로 공격도 준비합니다. 육군본부에 수도화기계사단과 26사단 병력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미 육본의 지휘체계가 무너진 탓에 출동 명령을 받지 못해 그만 실기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이건영 3군사령관과의 통화 녹취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 |
이건영 3군사령관 |
수도기계화사단이랑 26사단 정도 갖다 놓고 하는게 어떠냐 하는 의견이 오가는데 군사령관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
장관님하고 통화할래도 안 계시고 합참의장님하고 통화도 안 되고 도무지 웃사람이 없어요 |
또 절대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라고 한 노재현 국방장관의 명령도 족쇄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령관으로 부임한지 24일째, 행정병과 취사병까지 끌어 모아 맞서려 했던 장태완 사령관은 13일 새벽 3시 40분경, 하나회 출신으로 신군부 반란에 가담한 신윤희 헌병단 부단장에게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노재현 국방장관의 이해 못 할 행적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은 총성이 울리자 군을 지휘하기는 커녕 가족들과 함께 인근 단국대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미연합사 상황실로 피신합니다. 이후 뒤늦게 국방부에 나타나 3군사령관에게 병력을 출동시키면 안 된다고 지시합니다.
노재현 국방장관 | 오국성 | |
□ 1926년 8월4일 생 2019년(향년93세) □ 20대 육군참모총장 14대합동참모의장 21대 국방부장관 (1977년 12월20일 ~ 1979년 12월14일) □ 군사반란의 조력자 역할 평가 |
□ 김의성 배우 |
13일 새벽 신군부는 국방부를 장악한 뒤 지하실에 숨어있던 그를 발견해 연행합니다. 이후 신군부의 요청대로 정승화 총장 체포 사후 결재에 서명하고 최규하 대통령에게도 재가를 강요해 받아냅니다. 이로써 군사 반란은 성공으로 끝이 났습니다.
노재현 국방장관의 행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우세합니다. 애초에 피신한 한미연합사에서 상황을 파악하며 군을 지휘했다면 신군부는 권력 장악에 실패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군부를 진압하려는 세력이 분명이 존재했고 미국도 부정적 입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1996년 1월 월간조선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당시 못한 일이 하나도 없으며 그때 자신의 행동이 아니었다면 서울은 불바다가 됐을 것이라고 말해 빈축을 샀습니다.
월간조선 1996년 1월호 | |
□ [인터뷰]노재현, 최초의 항변 장태완의 무능이 1212 성공시켰다 |
□ 인터뷰 중에서 "그날 저녁 나는 장관으로서 못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면 서울이 불바다가 됐어요" |
1212 군사 반란 관련자들은 아무런 증언도 고백도, 반성도 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전두환이 노태우가, 노재현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진압 명령에 결국 불복한 손길남 당시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같은 생존자들도 말이 없습니다. 그는 쿠데타 군과 통화하며 결국 부대 출동을 거부한 인물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더 이상 악당들의 승리가 역사에 기록되지 않도록, 조력자들이 침묵하지 않도록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 영화 서울의 봄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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