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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에 꼬리를 무는 영화 이야기

1212 반란 요새 30경비단과 하나회, 장세동·박희도·최세창

by 소피스트28호 2023.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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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당시 반란군은 30경비단과 보안사를 지휘부로 이용했습니다. 30경비단은 정치군인들이 출세의 발판으로 거쳐 가는 곳이었고 특히 군내 사조직으로 말썽 많았던 하나회가 자리를 대물림 해왔습니다.

알트태그-30경비단 포스팅의 썸네일


1212 군사 반란의 요새 '30경비단'

30경비단은 1212 군사 반란을 계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정식 명칭은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30경비단입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을 모의하고 지휘하는 현장으로 사용됐습니다.

알트태그-30경비단 부대 모습알트태그-30경비단 훈련 모습
30경비단 전경(좌)과 훈련모습(우)



1212에 대한 검찰의 재조사 결과 군사 반란의 첫 모의는 12월 7일로 드러났습니다. 당시 9사단장인 노태우는 외박을 나와 전두환 만났고, 두 사람은 12월 12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해 조사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주재하는 첫 국무회의가 12월 13일 열리는 것을 노리고 하루 전인 12일을 거사일로 정했습니다. 정승화 총장을 연행 조사하고 수사 결과를 국무회의에 보고해 교체하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경복궁 안에 위치한 30경비단은 청와대 경호를 맡고 있어 직속상관인 수경사령관의 출입도 통제되는 곳이지만 반란군 수뇌부는 이곳에서 회합을 갖고 반란을 모의했습니다. 당시 장태완 사령관은 부임한지 24일째, 작전참모를 통해 수경사 예하 5개 단중 30경비단장과 33경비단장, 헌병단 단장이 하나회 소속인 것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반란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30경비단장은 전두환의 최측근인 장세동 대령입니다. 훗날 5공 실세로 2인지 노릇을 톡톡히 한 인물입니다. 30경비단은 청와대와 가까워 외부 공격으로부터 방어에 유리하고 첨단장비를 갖춘 상황실도 보유했습니다.

장세동 대령
(1212 당시 30경비단장)
  장민기 대령
알트태그-장세동 30경비단장

1936년 9월27일 생


육사16기
하나회 가입


1212 공로로 준장 진급
3공수여단장 부임


대통령경호실장
(81년7월~85년2월)
13대 안기부장
(85년2월~87년5월)
5공 핵심 실세

안세호 배우
30경비단장 역

알트태그-장세동 역할의 장민기 대령



당시 보안사의 막강한 정보수집능력도 육군본부를 비롯한 진압군 측의 지휘 체계를 무력화하는데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보안사는 각 부대의 움직임을 통신감청을 통해 상세히 파악했고, 반란군 지휘부는 이 정보를 바탕으로 진압군의 병력 출동을 전화로 적극 만류했습니다.

이때 반란군들은 '가만히 있으라'며 부대 출동을 적극 만류했습니다. 불확실성이 큰 위기의 순간에 굳이 나서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는 말은 달콤한 권유로 작용했고, 가만히 있었던 자들 또한 충분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알트태그-MBC 뉴스데스크 바로가기
96년 12월 17일 MBC뉴스 바로가기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출범 이후 하나회 척결과 경복궁 복원계획에 따라 30경비단 이전이 결정됐고 1966년 33경비단과 통폐합돼 1경비단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수방사 30경비단
알트태그-수방사 30경비단 부대 마크
일제시대
경복궁 북단
1만 3천평 크기

일제도 군을 주둔함
1961년
5.16 당시 동원된
육군 30사단 1개 대대를
청와대 경비를 위해 주둔시킴


6월 1일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30대대로 정식 발족

1970년대
1968년 김신조 사태때
청와대 부근 침투 막지 못함


1974년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되면서 경비대대에서
경비단으로 확대 개편


경호실 직속
하나회가 대물림하는
확실한 출세코스가 됨
1996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경복궁 복원계획에 따라
부대 이전


33경비단과 통폐합
제1경비단으로 바뀜



군부내 핵심 사조직 '하나회'

하나회는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육사 11기에서 비롯됐습니다. 육사 11기는 1951년 경남 진해에 육군사관학교가 정식 개교할 때 입학한 기수로 정규 4년제 교육을 받은 첫 기수이기도 합니다. 진짜 육사 1기라는 강한 연대감을 가졌습니다.

알트태그-육사11기 졸업 임관식 사진알트태그-육사생도 5.16. 지지 시가행진
육사 11기 졸업 임관식(좌) 육사생도 5.16 지지 행진(우)



5·16 쿠데타 이후 전두환의 주도로 육사 생도와 졸업생 장교 천여 명이 쿠데타 지지시위를 하면서 박정희의 비호를 받기 시작합니다.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영남권 위주의 친목 사모임은 1963년 하나회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합니다.

기수별로 10여 명씩 은밀하게 사조직을 확장했고 박정희의 비호 아래 군내 요직을 독점합니다. 하나회 가입 선서 중에는 선후배와 동료들에 의해 합의된 명령에 복종하고, 의리와 맹세를 저버리면 인간적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을 각오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군의 공적 명령보다 우선하는 하나회의 이 강령이 12·12 군사반란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을 당시 하나회는 육사 11기부터 20기까지 사단장 20명 이상과 공수여단장 그리고 80명 가까운 연대장과 대대장 등을 거느린 정치군벌로 몸집을 키웠습니다. 또 수장인 전두환, 노태우가 차례로 대통령에 오르고 대부분이 내각과 국회로 진출하면서 5공과 6공 최고의 권력집단이 됐습니다.

하나회는 1993년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의 전격적인 숙청으로 해체됐지만 쿠데타설이 퍼지기도 했고 그해 연말까지 유령처럼 소문으로 계속 떠돌았습니다.

알트태그-하나회 숙청 KBS뉴스
93년 7월18일 KBS뉴스 바로가기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박희도, 직속 사령관 체포한 최세창

박희도는 1975년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추천으로 1공수여단장에 취임했습니다. 1년 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하자 박희도는 박정희의 특별지시에 따라 보복작전을 감행했습니다. 박정희는 자신의 명령을 수행한 박희도에 대한 미국 측의 조치 요구를 무마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후 박희도에게 진짜 위기가 찾아옵니다. 1978년 11월 무장공비가 제1공수여단의 위수 지역을 침범해 군사 기밀을 캐낸 후 임진강을 건너 돌아간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인 이세호 대장은 박희도를 강하게 문책하며 옷을 벗기기로 했는데 정병주 사령관이 나서 대통령의 특별작전을 수행한 지휘관이라며 적극 무마에 나섰습니다.

정병주 사령관의 노력으로 박희도는 군에 남을 수 있었지만 1년 뒤 1212 군사반란에 참가하면서 은혜를 철저한 배신으로 되갚았습니다.

박희도
(당시 1공수여단장)
  도희철 준장
알트태그-박희도 1공수여단장

1934년7월22일 생


1212 당시
1공수여단장
26대 육군참모총장
(85년12월~88년6월)

현재 극우보수 활동중


1978년 무장공비
침투건으로 예편 위기

정병주 사령관의 노력으로
위기 넘겼지만
1년 디 군사반란으로
은혜를 배신으로 갚음



최병모 배우

알트태그-박희도 역할의 도희철 준장



박희도는 1공수여단을 이끌고 행주대교를 건너 육본과 국방부를 장악했습니다. 반란의 1등 공신인 된 박희도는 그해 소장으로 진급해 26기계화보병사단장, 이듬해 중장으로 또 진급해 특전사령관, 그리고 1985년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습니다. 전역 후 정계진출을 노렸지만 실패했고 김영삼 정부 시절 군사반란 혐의로 징역을 산 뒤 석방돼 현재는 극우 보수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직속 상관이 있는 서울 거여동 특전사령부를 공격했습니다.

최세창
(당시 3공수여단장)
  김창세 준장
알트태그-최세창 3공수여단장

1934년4월17일 생


제9대 3군사령관
(85년12월~87년12월)
22대 함동참모의장
(87년12월~89년4월)
29대 국방장관
(91년12월~93년2월)


특전사령부 공격
직속 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

직속상관에게 총 들이댄
패륜 군인

김성오 배우

알트태그-최세창 역할의 김창세 준장



이 과정에서 정병주 사령관은 총상을 입고 체포됐고 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은 숨졌습니다. 직속 상관에게 총부리를 들이댄 최세창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했고 3군사령관, 합동참모의장, 29대 국방장관 등을 역임했습니다.

박희도와 최세창은 2019년 12월 12일, 전두환, 정호용 등과 함께 군사반란 40주년을 기념하는 호화 만찬을 즐기는 장면이 발각돼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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