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드라마가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을 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귀주대첩은 세 차례, 25년에 걸친 고려거란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동아시아 국제질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고려의 실리외교 살펴봅니다.
제3차 고려거란전쟁의 이유
거란은 3차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지만 정복에 실패하고 3차 전쟁인 1019년 2월 귀주에서 강감찬 장군에게 대패한 뒤 더 이상 고려를 넘보지 못했습니다.
거란은 2차 침입(1010년)때 고려 현종의 친조 약속을 구실로 군사를 철수했습니다. 친조는 제후국의 왕이 황제국의 황제를 알현하는 것으로 고려가 거란에 복종하며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거란이 철수한 뒤 현종은 친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고려가 펼친 외교술에 거란이 넘어간 결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거란의 황제 야율융서(성종)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친조 약속을 지키거나 강동 6주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강동 6주(江東六州)는 압록강 동쪽의 6개 주를 말하는 것으로 흥화진과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입니다. 993년 거란의 제1차 침입 때 서희가 담판을 벌여 고려의 영토로 확보한 곳입니다.
강동6주 |
□ 고려 성종 12년 993년 내사시랑이자 중군사인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과 외교담판을 벌여 획득한 영토 □ 여진이 길을 막고 있으니 그들을 쫓아내고 압록강 하구 일대 통제권을 주면 거란과 친하게 지낼 것을 약속 □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고 송나라와 통교를 끊으며 형식적으로 조공하는 대가로 영토확장 |
고려는 거란의 요구를 거부하고 도통사 강감찬 장군을 최고사령관인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해 전쟁에 대비합니다. 거란의 황제 야율융서는 소배압에게 황제 직속 부대인 우피실군을 포함한 10만의 대군을 주며 전쟁을 지시합니다. 1018년 12월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너 세 번째 침입을 감행합니다. 제3차 고려거란전쟁의 시작입니다.
고려거란전쟁의 원인 | |
1차 고려거란전쟁 고려 성종 12년 993년 |
□ 송나라와 전쟁을 앞두고 고려에 송나라와 관계 단절, 자신들과 교류 요구 □ 고려가 거부 *고려는 발행를 멸망시킨 거란을 싫어함 거란이 보내온 낙타 50마리를 굶겨죽임 (만부교 사건) 태조 왕건 훈요10조에서 짐승 같은 거란을 본받지 말 것 당부 □ 소손녕이 80만 대군으로 침공 (실제로는 6만이 중론) |
2차 고려거란전쟁 1010년(현종 원년) ~ 1011년(현종 2년) |
□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옹립된 것을 명분삼아 침입 □ 요나라 성종 야율융서가 40만 대군 이끌고 침입 □ 현종의 친조를 약속받고 철수, 고려 양규, 김숙흥에게 큰 피해 입고 패퇴 |
3차 고려거란전쟁 1018년(현종 9년) ~ 1019년(현종 10년) |
□ 현종의 친조 이행, 강동6주 반환을 명분으로 침입 □ 소배압이 황제의 친위부대 우피실군을 포함한 10만 거란군을 이끌고 침입 □ 상원수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에서 물리침 |
귀주대첩,10만 거란군을 섬멸하다
강감찬 장군은 20만 8천 명의 고려 군사를 이끌고 흥화진으로 이동해 거란군의 침입에 대비합니다. 거란군이 흥화진 인근 삼교천을 넘어 공격할 것에 대비해 소가죽으로 물을 막고, 기마병을 잠복시켜 승리를 거둡니다.
소가죽으로 물을 막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논란이 있지만 고려사에 분명한 기록이 전하고 있고 도강의 어려움, 거란의 병력을 분리시키는 효과는 분명히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교천을 건넌 거란군은 일부일 뿐, 나머지 주력군은 내륙 산길을 통해 개경으로 빠르게 남하했습니다. 소수의 병력으로 고려의 눈을 돌린 뒤 속도전으로 개경에 입성해 고려 현종을 사로잡고 전쟁을 끝내겠다는 소배압의 계략으로 보입니다.
강감찬 장군은 김종현에게 1만의 군사를 주며 개경으로 빨리 이동해 수성할 것을 지시합니다. 또 부원수 강민에게도 군대를 주어 거란군을 추격하며 공격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거란군은 남하과정에서 마탄 등지의 전투에서 일부 병력을 잃었지만 1019년 1월 3일, 개경과 백리 거리인 신은현까지 도달합니다. 하지만 현종의 지시로 백성들을 성안으로 들이고 모든 것을 불태우는 청야작전이 실시된 이후여서 거란군은 약탈할 것이 없어 조달에 큰 어려움에 처합니다.
소배압은 군사를 돌리는 척하며 기병 300명을 숨겨 입성을 노렸는데 현종이 보낸 기마병에게 오히려 기습당해 전멸합니다. 위기감을 느낀 소배압은 군사를 돌려 다시 귀주로 향했고 강감찬 장군과 격돌합니다.
1019년 2월 1일 귀주벌판에서 고려군과 거란군은 배수진을 치고 대회전을 벌입니다. 강감찬은 소배압의 퇴로를 막고 벌판에서 한판 정면 승부를 선택했습니다. 거란군을 섬멸해 다시는 고려 땅을 넘볼 수 없게 하겠다는 전략이 깔려 있었습니다. 장시간 전투가 이어지던 가운데 개경 방어를 위해 남하했던 김종현의 기마부대가 전장에 합류하면서 고려가 승기를 잡았고 바람의 방향도 바뀌면서 고려는 큰 승리를 거둡니다. 한반도 3대 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귀주대첩입니다.
고려사절요 권3 |
고려사절요 권4 |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기까지 쓰러진 시체가 들을 가득 채우고... ... 살아서 돌아간 적군은 겨우 수천인에 불과하였다. 거란의 병사들이 패배한 것이 이때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
"강민첨이 원수가 되어 북을 치며 힘껏 돌격하여 반령의 들판에서 크게 패배시켰으니 거란군이 퇴각하면서 창과 갑옷을 내버려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강민첨은 1만 명을 포로로 잡거나 참수하였다" |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과 고려의 실리외교
귀주대첩으로 고려는 거란과 25년에 걸친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했습니다. 2차 침입을 겪은 뒤 현종이 리더십을 발휘하며 백성의 마음을 얻고 강감찬을 상원수에 임명해 전쟁에 대비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거란의 기병 전술을 받아들여 전력을 보강하고 검차 같은 신무기도 잘 활용했고 험한 산세를 이용해 평야에서 말을 타던 거란군을 무력화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청야전술등 적절한 전략과 전술로 승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고려 현종은 개선장군 강감찬에게 황금꽃을 주고 9천여 명을 포상한 반면 거란 황제 야율융서는 소배압의 낯가죽을 벗겨 죽일 것이라고 격노했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정보사업 보다는 내정에 힘을 쏟는 정책위주로 변신을 시도합니다. 송나라와는 화친을 약속하는 전연의 맹을 맺었고 고려와는 더 이상 전쟁을 하는게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겁니다.
반면 고려는 송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주변국들 사이에서 당대 최강인 거란(요나라)를 꺾은 강대국으로 인전받기 시작했습니다. 국제적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겁니다.
여기서 더욱 놀라운건 고려가 자만에 빠져 있지않고 실리 외교를 펼치며 100년 평화의 시대를 열어갔다는 사실입니다. 귀주대첩 1년 뒤인 1020년 2월 고려는 거란에 사신을 보내 사대관계를 복원할 것을 먼저 요청합니다. 전쟁에서 이긴 고려가 패전한 거란에게 상국으로 인정하겠다며 공물을 바치겠다고 제안한겁니다.
거란은 고려의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과거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친조 이행, 강동6주 반환같은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거란과 고려-송나라 3나라간 세력 균형 속에 향후 100년간 평화가 이어지며 고려는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나라 고려의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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