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드라마의 영향으로 양규와 강감찬 장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고려의 구국 영웅을 조선은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 조선왕조 실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양규와 강감찬
고려거란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양규와 강감찬 장군은 시대를 대표하는 무장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기록돼 있습니다.
조선 초기인 세조 2년, 1456년 집현전 학자인 양성지는 무성묘(武成廟)를 세워 조선 개국 이전에 큰 공을 세운 장군들의 위패를 모실 것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허락받은 기록이 세조실록에 실려 있습니다.
무성묘는 중국에서 주나라를 세울 때 공이 컸던 강태공을 무의 상징으로 삼고 무성왕으로 추대한 고사에 따른 것으로 신라 김유신, 고구려 을지문덕처럼 시대를 대표하는 무장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세조실록 |
□ 세조실록 권3 세조 2년 3월 정유 □ 신라의 김유신,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의 유금필, 강감찬, 양규,윤관,조충, 김취려,김경손,박서 김방경,안우,김득배 이방실,최영,정지 본조의 하경복,최윤덕을 배향하게 하소서 |
거란의 대군에 맞서 고려를 구해낸 양규와 강감찬 장군이 무성묘에 모셔졌고 고려시대 장수로는 유금필, 윤관, 김취려, 김방경, 최영 장군 등이 함께 모셔졌습니다.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를 맡은 양규 장군은 고려의 최전방 요새 흥화진에서 3천 명의 병사로 거란의 40만 대군과 맞서 수성하고 곽주성을 탈환하는 등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한달간 7번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포로가 된 고려의 백성 3만 명을 구해냈습니다. 고려의 이순신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규 장군 (지승현 배우) |
업적 |
□1011년3월11일 사망 □경력 형부낭중 서북면 도순검사 공부상서 □공훈 삼한후벽상공신 |
□고려사 양규 열전 "양규는 원군도 없이 한달 사이에 일곱 번을 싸워 많은 적의 목을 베었고, 포로 3만여 명을 되찾았으며 말과 낙타, 병장기를 노획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 □ "양규와 김숙흥은 종일 힘써 싸웠지만 병사들이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모두 진중에서 전사했다" |
고려의 최고 사령관 상원수인 강감찬은 거란의 3차 침입때 귀주성 앞 평원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치고 25년에 걸쳐 이어진 고려거란전쟁을 승리로 끝냈습니다. 성종실록(성종 8년 9월 경진)은 거란의 30만 군사가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는데 이것은 나라의 형세가 바야흐로 강하고 강감찬이 그 재주와 지혜를 펼 수 있었기 때문이라며 귀주대첩에 대한 평가를 남겼습니다.
강감찬 장군 (최수종 배우) |
업적 |
□ 948년 출생 1031년 사망 (향년 82세) □ 3차 여요전쟁 도통사 상원수 □공신호 추충협모안국공신 |
□ 3차 여요전쟁 마지막 날인 1019년2월1일 귀주성 앞 평원에서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 물리침 □ 25년에 걸친 여요전쟁 종료 □ 송나라 부필의 '하북수어십이책' 기록 "고려가 거란 병사 20만을 살해하여 한 필의 말과 한 척의 수레도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거란이 항상 두려워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
임진왜란을 치른 선조와 병자호란을 겪은 광해군도 전란 이후 고려 왕들의 묘를 정비할 것을 지시했는데 그 중에는 강감찬의 묘도 포함됐습니다. 나라를 구한 영웅을 기리고 존중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지만 전란 직후 고려의 영웅을 기렸다는 사실을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
□선조실록146권 선조35년 2월5일 무진 1번째 기사 "전대의 충신으로서 신라의 김유신,김양 백제의 성충,계백 고려의 강감찬, 정몽주의 무덤도 또한 봉분을 만들고 ..." |
광해군일기 |
□광해군일기 [정초본]25권 광해2년 2월6일 임자 2번째 기사 "전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서 신라의 김유신,김양 백제의 성충,계백 고려의 강감찬 정몽주 등과 같은 이에 대해서는 그 묘를 봉분해 주고 나무를 심고서 불을 금하고 벌채를 금하게 하라" |
고려의 영웅들은 조선에서도 추숭되었다
고려시대 거란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들은 조선에서도 추숭되었습니다. 추숭은 죽은 이를 기리며 숭상하는 것을 말합니다.
강감찬 장군은 태조 원년인 1392년 금천(지금의 경기도 광명)의 충현서원과 연천군 미산면에 있는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됐습니다. 충신을 높이 받들면서 옛 왕조인 고려에 여전히 향수를 느끼는 이들을 달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종은 고려왕조 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단행했습니다. 고려의 왕과 더불어 고려의 공신과 충신, 명장 등도 함께 제사를 지내도록 했는데 강감찬, 서희, 정몽주 등이 대상에 올랐고 고려 중기 이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윤관도 포함됐습니다.
윤관(尹瓘, 1040~1111)은 고려 예종 2년 별무반을 편성해 여진을 소탕하고, 9성을 설치해 영토를 확장한 인물입니다. 이후 고려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통치 질서를 수립하고 영토도 확장했는데 조선에서도 여진과의 분쟁이 이어지면서 윤관의 업적이 재조명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도 무력을 강화하는 대책으로 과거 명장들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했고 인조는 즉위 23년인 1645년, 평안도 선천군에 있던 삼충사(三忠祠)를 재건했습니다. 삼충사는 고려가 양규 장군과 김숙흥, 유백부 3인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사당으로 이후 여러 병란을 거치며 사라졌는데 인조 때 다시 세워진 겁니다.
조선 후기에 쓰여진 책 해동 명장전에는 조선의 명장인 권율, 곽재우, 김시민 장군 등과 함께 양규, 강감찬 장군의 전기도 실렸습니다.
그동안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콘텐츠는 조선과 삼국시대에 비해 적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결과 후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역사로 남았습니다. 대하사극을 계기로 고려와 역사적 인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인물을 원하는 현대인들의 바람과 요구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떤 시대, 어떤 인물을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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