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에 꼬리를 무는 영화 이야기

‘고려 거란 전쟁’, 양규·김숙흥·지채문 장군 재조명

by 소피스트28호 2024. 1. 11.
반응형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흥행 속에 역사적 조명이 드물었던 양규·김숙흥·지채문 장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 속 행적을 살펴봅니다.

알트태그-고려거란정쟁 포스팅의 썸네일


고려의 '이순신' 양규 장군과 김숙흥 장군

고려 장수 양규와 김숙흥은 그동안 역사적 조명이 드물었지만 고려의 '이순신 장군'으로 불릴 만큼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목종의 뒤를 이어 고려 8대 왕에 오른 현종의 원년인 1010년 음력 11월, 거란(요나라)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략합니다. 거란군을 이끈 인물은 거란 최고의 전성기를 만든 '아율융서(성종)'입니다. 무신인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하자 역적(강조) 토벌을 명분으로 침략했는데 실질적인 이유는 고려와 송나라(북송)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거란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거란은 송나라를 중원에서 몰아내고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고려는 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지 얼마되지 않은 왕과 중앙집권의 기틀조차 미약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려에는 양규 장군이 있었습니다. 직책은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 서북면 지역의 방어를 총괄하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자리입니다.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는 지승현 배우가 역할을 맡았습니다.)

알트태그-양규 장군 역을 맡은 지승현 배우

양규 장군
(지승현 배우)

출생 모름

사망
1011년3월11일
(음력 1월28일)


서북면 도순검사
공부상서 추증


공훈
삼한후벽공신
(1024년)




양규 장군은 최전방 요새 흥화진에서 3천 명의 병사로 거란의 40만 대군에 맞서 싸웁니다. '흥화진'은 지금의 평안북도 피현군 백마산성으로 추정됩니다. 일주일간 이어진 파상공세에도 흥화진을 함락하지 못한 거란군은 병력의 절반을 남기고, 나머지 병력으로 남하합니다. 3천 명의 병사로 거란 대군의 절반을 묶어 세운 겁니다.

알트태그-거란의 고려 침략 경로
거란의 고려 침략 경로(두피디아)



거란군은 통주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본진 30만 군사를 대파하고 진격해 이듬해 음력 1월 1일 수도 개경에 입성합니다. 현종은 몽진을 떠났고 거란군은 개경에 열흘 정도 머문 뒤 철군을 결정합니다. 이렇게 전쟁의 흐름이 바뀌게 된 건 양규 장군 때문입니다.

귀주성에서 온 김숙흥 부대와 연합작전으로 거란군이 지키던 곽주성을 기습해 성을 되찾고 거란군의 보급과 퇴로를 막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거란군이 의주에서 개경까지 남하하며 차지한 성은 곽산과 안주 2개였는데 그 중 중간 보급 기지인 곽산성을 탈환한 겁니다.

알트태그-김숙흥 역의 주연우 배우

김숙흥 장군
(주연우 배우)

출생 모름

사망
1011년3월11일
(음력 1월28일)


귀주 별장


공훈
삼한후벽공신
(1024년)



고려사 기록에는 야간에 곽주로 들어가 잔류한 거란 병사들을 습격해 모두 목을 베었고 성안에 있던 백성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후 양규는 김숙흥과 함께 퇴각하는 거란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거듭하며 한 달 동안 7번을 싸워 많은 적군을 베고 포로가 되었던 3만여 명을 되찾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낙타와 말, 병장기를 노획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알트태그-고려의 역사를 정리한 고려사


□ 고려사
조선시대 편찬된
고려 역사서

*고려사절요
고려사 축약본


양규열전
"거란 침략군의
항복 권유를
거부하고
흥화진을
굳게 지키다"


"양규가 흥화진에서
군사 7백여 명을
이끌고 통주로 와
흩어진 군사
1천 명을 수습하였다.

밤중에 곽주로 들어가
전류한 거란 병사들을
습격해 모조리 목을
베었으며, 성안에
있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양규는 고립된 군사들과
한 달 동안 모두 7번 싸워
죽인 적군이 매우 많았고,
포로가 되었던
3만여 구를 되찾았으며
노획한 낙타, 말, 병장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송나라의 역사책인 '송사'는 12세기 고려의 인구를 210만으로 전하고 있는데 전체 인구의 1.4%를 구해낸 셈입니다. 당시 고려의 인구 규모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지만 대단한 업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고려 백성을 구출하는 양규 장군(좌) 전투 중인 김숙흥(우)



양규와 김숙흥은 1011년 음력 1월 28일 영변 부근에서 전투를 하던 중 거란 성종이 이끄는 본진과 맞닥뜨리게 됐습니다. 적은 병력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지만 병사들이 죽고 화살도 모두 바닥나 진중에서 전사했다고 고려사는 두 장군의 최후를 전하고 있습니다.

알트태그-양규, 김숙흥 장군의 최후 장면 바로가기
양규, 김숙흥 장군의 최후 바로가기



압록강에 도착한 거란군은 흥화진에 남아 있던 고려군의 공격을 받았고, 강을 건넌 이후에는 고려군의 분전에 고무된 여진족의 공격으로 거란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후 3차 침공까지 3년이 걸렸고 그사이 고려는 일전을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현종 몽진길 끝까지 지킨 '호위무사' 지채문 장군

거란군은 양규 장군이 지휘한 흥화진에 발이 묶였지만 뛰어난 기동력으로 나머지 병력을 남하시키며 전쟁을 이어갑니다. 군사력을 집중한 통주 전투에서 고려는 대패하고 총사령관 강조마저 붙잡혀 처형당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고려, 현종은 피난해 후일을 도모하자는 강감찬의 말을 받아들여 몽진을 떠납니다.

알트태그-지채문 장군 역의 한재영 배우

지채문 장군
(한재영 배우)

알트태그-지채문 장군 상상도

1026년
(현종 17년 사망)


동북면 중랑장
재임 중
거란 2차 침공


강감찬의 몽진 주장을
현종이 수락하자
임금의 호위를 
자청한 것으로 기록



외가가 있는 나주까지 현종의 몽진길을 호위무사 지채문이 끝까지 따릅니다. 당시 고려 왕조는 안정을 찾지 못했고 지방 호족들의 권세가 강했던 탓에 지채문은 호족과 거란을 동시에 경계해야 하는 이중고를 견뎌내며 왕을 호위합니다.

알트태그-왕의 피난길을 위협하는 호족알트태그-현종을 호위 중인 지채문
왕의 피난길을 위협하는 호족(좌) 현종을 호위중인 지채문(우)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지채문은 주무기인 활로 호족의 위협을 매번 물리치며 현종을 구하고 성심껏 보필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현종은 신료들이 모두 도망가 흩어졌지만 오직 지채문 만이 끝까지 소나무, 대나무 같은 절개를 지켰다며 교서와 함께 토지를 상으로 내립니다.

역사에 묻힌 세 장군의 공통점 "책임감 강한 공직자"


세 장군은 자신들의 안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직분과 책임에 몰두했습니다. 내가 맡은 임무는 목숨을 걸고 완수한다는 바람직한 공직자의 모습이 투영되면서 드라마를 본 시청자나 소설을 읽은 독자, 대중들이 뜨겁게 반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이가 그만큼 드물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 우리가 양규 장군과 같은 영웅을 발굴하고 예우하는데 인색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알트태그-유튜브 일큐육공 바로가기
유튜브 일큐육공 바로가기



고려 거란 전쟁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없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2차 전쟁의 고초를 딛고 현명하고 강인한 왕으로 거듭나 3차 침공에 대비하고 마침내 승리한 현종과 위기의 고려를 구해 낸 장수들, 그리고 사대주의 매몰되지 않고 펼친 활발한 다자외교 등이 그것입니다. 역사의 성공 사례로 자랑스럽게 소환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함께 보면 좋은 글]

 

노량 죽음의 바다‥이순신 장군, 7년 임진왜란을 끝내다

노량해전은 퇴각하려는 왜군을 섬멸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이 명나라 수군과 함께 치른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입니다. 7년 임진왜란을 끝낸 노량해전에 대한 배경지식을 모두 알려드립니다. 임

world-curiosity.com

 

 

드라마 연인과 병자호란 그리고 천연두

드라마 연인이 병자호란을 거쳐 청나라 볼모 생활로까지 스토리가 진전됐습니다. 극중 주인공이 천연두에 감염되기도 했는데 실제로 천연두 때문에 병자호란이 조기 종결됐다는 연구도 있습니

world-curiosity.com

 

반응형

댓글